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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밀레니엄 1부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상하) 2008.10.10


밀레니엄 1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처음 이 책의 표지만 봤을 때는 오멘이나 엑소시스트 같은 오컬트 무비가 생각났다. 힘도 별로 없어보이는 어린 소녀가 인형의 목만 대롱대롱 매달린 목걸이를 걸고 무섭게 눈을 흘기고 있으니 말이다. 아님 요즘 유행하는 사이코패스 이야기인가? 그나저나 왜 항상 불쌍한 여자들만 죽어나가야 하나  등등
이런 저런 예상과 기대 속에 낯선 스웨덴 표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대략 5명 정도이다.
시사경제잡지 <밀레니엄>의 잘나가는 기자였다가 이상한 사건에 휘말려 졸지에 감방 신세에 처하게 생긴 '미카엘 블롬크비스트', <밀레니엄>의 능력있는 편집장이자 미카엘과 쿨한 불륜을 즐기는 '에리카 베르예르', 수십년전 갑자기 실종되어 그 생사 조차 알수 없게된 손녀의 행방을 찾는 대기업 전직 총수 '헨리크 반예르', 그리고 정체모를 묘령의 사설 조사원 '리스베트 살란데르', 마지막으로 어느날 갑자기 실종된 헨리크의 손녀 '하리에트 반예르'까지.

소설은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소하여 곧 감방에 가게 생긴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에게 헨리크 반예르가 사건을 의뢰하면서 시작된다(이 시작까지 약 100여 페이지는 미카엘을 둘러싼 상황 설명과 또다른 주인공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상황 설명 부분으로, 약간 지루하지만 밀레니엄 2,3을 위해 필요한 부분 같다).
헨리크가 설명하는 실종사건의 배경은 이러하다. 헨리크에겐 너무나 아끼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하리에트라는 손녀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손녀는 (사뭇 진지하고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중대하게 할 말이 있다고 찾아온다. 그러나 마침 바쁜 일이 있었던 헨리크는 나중에 듣겠다고 하며 손녀를 돌려보낸다. 그리고 그것이 손녀를 본 마지막 모습이 되어 버린다.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다리가 폐쇄되고, 사방은 바다와 절벽으로 둘러싸인 이 곳에서 하리에트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채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1년 후, 헨리크는 기묘한 우편물을 받게 되는데 ...... 과연 하리에트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 자는 누구일까.

책 날개에 기술된 작가 소개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을 쓴 스티그 라르손은 알아주는 장르소설 마니아이자, 비평가 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스티그 라르손의 첫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 된 밀레니엄에는 이제까지 우리가 봐왔던 추리소설의 다양한 요소들이 뒤섞여 있었다.

주인공 미카엘에게 사건을 의뢰한 헨리크 반예르가 속해있는 '반예르 가'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몰락하는 대가족'의 모습을 보는 듯 하고,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하리에트 반예르의 실종 사건은 '밀실살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리에트가 집착?했던 것으로 보이는 성서와 관련된 일련의 연쇄살인사건은 영화 '세븐'과 같은 스릴러를 떠오르게 하고, 집도 절도 없는 퇴직기자 미카엘에게 쏟아지는 뭇 여성들의 애정공세는 모스경감이나 필립말로의 미스테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탐정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기자'를 내세워 살인사건을 둘러싼 현대 사회의 거짓과 가식을 파헤치는 사회파 소설의 모습도 보여준다.

최근 <놈놈놈>으로 흥행 기록을 세운 김지운 감독의 에세이집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10년간 백수 생활을 했던 김지운 감독은 노는 동안 엄청난 양의 영화와 음악을 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번도 밖으로 쏟아낸 적 없는 '백수내공'이 처음 쓴 시나리오였던 <조용한 가족>의 성공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스티그 라르손도 비슷한 케이스가 아닐까. 작가는 수십년간 쌓이고 쌓인 수 많은 독서의 내공과, 직접 잡지사를 창간하고 글을 썼던 직업적 내공 모두를 이 소설을 통해 마음껏 쏟아낸 것 같다. 덕분에 각종 추리소설의 소재들이 풍부하고도 자연스럽게 이 한 권의 소설로 집약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즉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밌었다.

가끔 사건 해결에 있어 '이건 너무 직관적인거 아닌가' 싶거나 리스베트에게 너무나 많은 능력을 준게 아닌가 싶은 장면도 있었지만, 여기저기서 얻어터지고 고생하는 미카엘의 모습을 보니 참 안쓰럽기도 해서 너그럽게 용서가 되었다. 하지만 가끔씩 등장하는 미카엘과 여성들의 멜로 장면에서는 '도대체 이 여자들은 이 남자가 뭐가 좋다는 건가' 싶은 생각이.... 풉.


추리소설에서 여자라는 존재는 왜 항상 피해자 아니면 들러리일까 불만 아닌 불만도 많았는데, 이 책에선 리스베트의 존재가 이런 나의 불만을 해소시켜주는 것 같다. 2부에서는 리스베트를 주인공으로 그녀의 개인사와 중심을 이룰 것 같은데, 사뭇 기대가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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