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홍당무

from 이야기의 숲 2009. 2. 2. 00:40



나의 지루한 일상에 신선한 돌팔매질을 한 영화, 미스 홍당무.
이건 정말 한국 영화계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기가 막힌 작품이다.(진짜 기가 꽉 막힘)
개봉 당시 극과 극의 평이 남무해서 관람을 고사한 것이 후회스럽다. 극장에서 다른 사람 반응 살피며 같이 봤음 좋았을것을.

미스홍당무는 언뜻 보면 최근 몇 년간 유행했던 '애인 없고, 인기 없고, 예쁘지도 않은 노처녀의 사랑찾기'  같다.
하지만 미스홍당무에는 마크다시(브리짓존스의 연인)가 없고, 지피디(최미자의 연인)도 없다.
그녀에게 있는 것이라곤 분신과 같은 핸드폰과 감정의 변화에 민감히 반응하는 안면홍조증 뿐.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으면 착하기라도 해야하는데 양미숙은 착하지도 않다. 게다가 말재주도 없고, 싸가지도 없으며, 분위기 파악도 못한다. 게다가 4년간 짝사랑한 남자는 심지어 유부남이다. 매일 매일 유부남과의 아찔한 연애를 꿈꾸는 이 비호감 여선생의 징글징글한 일련의 몸부림을 담은 영화가 바로 미스홍당무이다.

매사 삽질만 하는 양미숙에게 진짜 삽을 들려주는 유치하면서도 어처구니 없는 오프닝부터 '뭔가 이 영화 심상치 않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후 진행되는 모든 에피소드들이 정말이지 황당하다.
29살 노처녀 양미숙의 짝사랑 상대를 기껏 중학생 딸내미를 둔 유부남으로 설정한 점(보통은 훈남), 고아로 태어나 전국구 왕따로 자라난 양미숙의 유일한 친구를 전교 왕따 여중생으로 설정한 점(심지어 좋아하는 유부남의 딸), 모두에게 사랑받기에 양미숙의 미움을 독차지 하는 미녀 여선생에게 순수미와 백치미를 선물한 점(보통은 도도녀) 등 캐릭터 설정부터가 벌써 골때리지 않나. 어쩜 이래. 당최 깔끔하고 세련된 캐릭터가 없다. 근데 또 죽도록 밉고 짜증나는 캐릭터도 없다. 뭐지 이 야따꾸리한 감정은?

영화를 보다보면 각본-감독을 맡은 이경미 감독이 얼마나 자유롭게 시나리오를 써나갔는가를 알 수 있다. 뭐하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얌체공 같은 스토리는 기존의 관습이나 고정관념, 사회적 통념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다. 그게 말이 쉽지 평생을 한국사회에서 살다보면 자연스레 사회적 관습대로, 욕 안먹게 적당히 글이 써지는 법인데, 그 테두리를 자유자재로 뒤흔드는,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웃음이 나는, 오묘한 매력이 가득했다. 작정하고 '사회적 통념을 깨는 캐릭터를 쓰겠어!' 같은 작위적인 냄새 보다는 원고지 위에 날개를 단 펜자루가 술술 이야기를 써내려간듯한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걸 쓰면서 감독 스스로도 얼마나 재밌어했을지 상상이 되면서 부러워서 배아팠다.

지난해 말 이경미 감독이 추격자나 영화는 영화다 등을 밀어내고 각본상과 감독상을 탔을때, '저 영화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저러나' 싶었는데, 이제는 이해가 간다. 충분히 받을만했고 박수쳐줄만하다. (물론 아직 영화는 영화다를 못봤다. 컹)
한국영화계의 양미숙 같은 괴상망측하지만 사랑스러운 여성 캐릭터가 등장했다는 점,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여성감독이 탄생했다는 점 등 이래저래 주말 밤을 유쾌하게 마무리 지어 준 영화였다.
영화 분류는 코미디 드라마라고 되어 있던데, 글쎄... 난 판타지 멜로라고 하고 싶다. :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