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티에게

from 이야기의 숲 2009. 1. 2. 22:39

키티에게

키티, 난 정말 널 용서 할 수 없어. 나오미 왓츠가 연기한 키티는 결국 관객과 세상에게 용서를 받았어. 하지만 넌 아주 끝까지 막가더라? 그래서 너가 미웠어. 넌 나쁜 녀자야. 꼭 그렇게나 상대방과 너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내고서 '성장'해야만했니? 그냥 무난하고 평범하게 살 순 없었니? 고얀 것
정말 넌 진작에 철 좀 들었어야했어. 속상하다 진짜.
하지만 난 믿고 싶어. 넌 단지 깨닫지 못한 것 뿐이야. 월터에 대한 너의 마음은 동정심이 아니라 사랑이었음을, 가슴 터지게 열정적인 감정만이 사랑이 아니라 그를 향한 안타까움과 애달픔도 사랑의 또다른 모습이었음을 넌 깨닫지 못했던거야. 이런 바보(어째 80년대 멜로영화 대사 같네) 여튼 넌 네 복을 네가 찬거야. 월터 같은 남자가 어딨다고 정말. 학력 좋아, 인물 좋아, 성격 좋아!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도 널 사랑해준 남자잖아! 엉? 유노왓암셍?
결국 인생의 바닥을 치고서야 정신차린 어리석은 녀자 키티, 어쩌면 서머싯 몸은 너를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죽이고, 네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에게 배신 당하게 함으로써, 너에게 히딩크식 하드트레이닝을 시킨 것일지도 몰라.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잘 살아보렴. 찰스에게 그만 낚이고, 애 잘 키우고, 애 이름은 나오미 왓츠 마냥 '월터'라고 지어보렴. 그럼 무덤 속의 월터도 급방긋 할거야. 그렇게라도 해줘야지 안그럼 월터 억울해서 몽달귀신 될지도 모른단다. 그럼 안녕. 세이 굿바이.

너보다 어리지만 정신적으론 성숙한 Eva Kim 씀.


인생의 베일The Painted Veil, 서머싯 몸
(2008.03.23)


10개월만에 영화 페인티드 베일을 보니  예전에 쓴 글이 생각나서 퍼왔다. 
다시 봐도 재밌었다. 영화는 나름 해피엔딩인데 소설은 끝까지 속 터졌던걸로 기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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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살까지 사는 사나이(바이센테니얼맨 Bicentenial Man)
아이작 아시모프


200살까지 사는 사나이는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 바이센테니얼맨의 원작 소설이기도 한,
SF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앤드류'라는 로봇으로 미래의 언젠가에는 실존할 수도 있는 가정용 로봇이다.
모양은 스타워즈의 쓰리피오마냥 직립보행을 하는 철제모형으로 인간과 간단한 대화도 나눌수 있다.


힘든 가사일이나 돕고 어린 자녀들과 놀게 해주려는 목적으로 구입된 앤드류는 그러나 점점 여느 로봇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앤드류가 인간이 만든 것을 단순히 모방하는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창조하는 '인간적인 사고'를 한다는 점이다.

영화 '바이센테니얼맨'은 못봤지만 포털사이트에서 대충 줄거리를 살펴보니 로봇을 만드는 과정에서 인부가 샌드위치를 먹다가 마요네즈를 떨어뜨렸는데 그것이 예기치 않은 로봇의 생화학적 변이를 일으켜 앤드류가 탄생했다는 식의 얼토당토 않고 바보같은 배경을 만들었더라?(장난쳐? 로봇이 장난이야?)
하지만 원작소설에는 그런 바보같은 배경은 절대 없고, 단순한  제작과정상의 '버그'정도로 앤드류를 소개한다.
(인간으로 치면 돌연변이)
 
앤드류의 이러한 인간적 사고를 목격한 앤드류의 주인가족은 그를 진정한 자신들의 가족으로 받아들여
결국엔 그에게 '자유'를 선물한다. 자유를 얻은 그는 인간처럼 옷을 걸치고 다니고 도서관도 다니면서 로봇생태를 연구하는 등 날이 갈수록 (지능의 측면에서) 인간 그 이상의 존재로 성장해간다.
심지어 자신의 철제몸에 한계를 느낀 앤드류는 로봇회사의 신기술을 받아들여 인간과 거의 90%이상 흡사한 신체를 갖게 된다. 인간의 눈동자, 인간의 피부, 인간의 머리칼을 갖게 된 그는 더더욱 인간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인간의 삶에 큰 기여를 한다.
하지만 앤드류가 제 아무리 뛰어난 과학적 업적을 남기고, 세계사적으로 길이 남을 명사가 되었을지라도
그에게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넘사벽의 한계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가 '로봇'이라는 점이다.
앤드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점점 고통을 느낀다.

객관적인 능력이나 수명으로 보면 인간 보다 더 뛰어난 존재임이 분명한 앤드류,
그는 불사의 삶과 질병 없는 완벽한 신체, 한계를 모르는 두뇌와 도덕적으로도 완성된 인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항상 '완전한 인간'의 삶을 동경한다.

피노키오의 경우엔 나무인형이라고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 당하고(심지어 동네 애들이 피노키오를 나무에 목 매다는 장면도 있다), 거짓부렁 하면 의지와 상관없이 늘어나는 불량 코 때문에 인간을 꿈꿨다. 하지만 앤드류는 달랐다. 물론 앤드류 역시 그 시작은 주인에게 얽매이고, 그 누구에게라도 파괴될 가능성이 있는 불안정한 로봇의 삶을 탈피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충족된 이후에도 앤드류는 계속해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갈증을 느낀다.
결국 그가 원했던 것은 로봇으로서의 자유, 존엄, 권리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삶' 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불사의 삶도 부질 없다고 생각한 앤드류는 결국 치명적인 결단을 내린다.

만약 앤드류가 사는 세상에 앤드류 같은 능력을 가진 로봇이 몇 대 더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들은 서로 조직이 되고 정부가 되고 군대가 되어 인간 위에 군림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결국엔 인류가 로봇에게 관리되고 사육되는 매트릭스의 시대가 탄생했겠지.
하지만 앤드류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할 줄 아는 존재했다. 결국 그 사랑은, 그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최후의 상황으로 몰고갔고, 앤드류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남은 인간들은 그에게 Bicentenial 'Man'의 칭호를 선물한다.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들이 판치는 세상에 살면서
인간이 아닌 로봇이 인간이 되겠다고 극단의 선택까지 하는 것을 보고있자니
인간이 뭐가 좋아서 그러나 싶기도 하고
인간인게 부끄럽기도 하고
나 같으면 불사의 삶을 살아도 좋았을 것 같다라는 생각과 함께
그래서 철이는 그렇게 999호를 타고 우주를 누볐나보다 싶었다.

더불어 책의 마지막 단락을 읽으면서는
영화로 봤다면 눈시울을 붉혔을지도 몰랐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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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1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처음 이 책의 표지만 봤을 때는 오멘이나 엑소시스트 같은 오컬트 무비가 생각났다. 힘도 별로 없어보이는 어린 소녀가 인형의 목만 대롱대롱 매달린 목걸이를 걸고 무섭게 눈을 흘기고 있으니 말이다. 아님 요즘 유행하는 사이코패스 이야기인가? 그나저나 왜 항상 불쌍한 여자들만 죽어나가야 하나  등등
이런 저런 예상과 기대 속에 낯선 스웨덴 표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대략 5명 정도이다.
시사경제잡지 <밀레니엄>의 잘나가는 기자였다가 이상한 사건에 휘말려 졸지에 감방 신세에 처하게 생긴 '미카엘 블롬크비스트', <밀레니엄>의 능력있는 편집장이자 미카엘과 쿨한 불륜을 즐기는 '에리카 베르예르', 수십년전 갑자기 실종되어 그 생사 조차 알수 없게된 손녀의 행방을 찾는 대기업 전직 총수 '헨리크 반예르', 그리고 정체모를 묘령의 사설 조사원 '리스베트 살란데르', 마지막으로 어느날 갑자기 실종된 헨리크의 손녀 '하리에트 반예르'까지.

소설은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소하여 곧 감방에 가게 생긴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에게 헨리크 반예르가 사건을 의뢰하면서 시작된다(이 시작까지 약 100여 페이지는 미카엘을 둘러싼 상황 설명과 또다른 주인공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상황 설명 부분으로, 약간 지루하지만 밀레니엄 2,3을 위해 필요한 부분 같다).
헨리크가 설명하는 실종사건의 배경은 이러하다. 헨리크에겐 너무나 아끼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하리에트라는 손녀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손녀는 (사뭇 진지하고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중대하게 할 말이 있다고 찾아온다. 그러나 마침 바쁜 일이 있었던 헨리크는 나중에 듣겠다고 하며 손녀를 돌려보낸다. 그리고 그것이 손녀를 본 마지막 모습이 되어 버린다.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다리가 폐쇄되고, 사방은 바다와 절벽으로 둘러싸인 이 곳에서 하리에트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채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1년 후, 헨리크는 기묘한 우편물을 받게 되는데 ...... 과연 하리에트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 자는 누구일까.

책 날개에 기술된 작가 소개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을 쓴 스티그 라르손은 알아주는 장르소설 마니아이자, 비평가 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스티그 라르손의 첫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 된 밀레니엄에는 이제까지 우리가 봐왔던 추리소설의 다양한 요소들이 뒤섞여 있었다.

주인공 미카엘에게 사건을 의뢰한 헨리크 반예르가 속해있는 '반예르 가'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몰락하는 대가족'의 모습을 보는 듯 하고,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하리에트 반예르의 실종 사건은 '밀실살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리에트가 집착?했던 것으로 보이는 성서와 관련된 일련의 연쇄살인사건은 영화 '세븐'과 같은 스릴러를 떠오르게 하고, 집도 절도 없는 퇴직기자 미카엘에게 쏟아지는 뭇 여성들의 애정공세는 모스경감이나 필립말로의 미스테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탐정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기자'를 내세워 살인사건을 둘러싼 현대 사회의 거짓과 가식을 파헤치는 사회파 소설의 모습도 보여준다.

최근 <놈놈놈>으로 흥행 기록을 세운 김지운 감독의 에세이집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10년간 백수 생활을 했던 김지운 감독은 노는 동안 엄청난 양의 영화와 음악을 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번도 밖으로 쏟아낸 적 없는 '백수내공'이 처음 쓴 시나리오였던 <조용한 가족>의 성공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스티그 라르손도 비슷한 케이스가 아닐까. 작가는 수십년간 쌓이고 쌓인 수 많은 독서의 내공과, 직접 잡지사를 창간하고 글을 썼던 직업적 내공 모두를 이 소설을 통해 마음껏 쏟아낸 것 같다. 덕분에 각종 추리소설의 소재들이 풍부하고도 자연스럽게 이 한 권의 소설로 집약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즉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밌었다.

가끔 사건 해결에 있어 '이건 너무 직관적인거 아닌가' 싶거나 리스베트에게 너무나 많은 능력을 준게 아닌가 싶은 장면도 있었지만, 여기저기서 얻어터지고 고생하는 미카엘의 모습을 보니 참 안쓰럽기도 해서 너그럽게 용서가 되었다. 하지만 가끔씩 등장하는 미카엘과 여성들의 멜로 장면에서는 '도대체 이 여자들은 이 남자가 뭐가 좋다는 건가' 싶은 생각이.... 풉.


추리소설에서 여자라는 존재는 왜 항상 피해자 아니면 들러리일까 불만 아닌 불만도 많았는데, 이 책에선 리스베트의 존재가 이런 나의 불만을 해소시켜주는 것 같다. 2부에서는 리스베트를 주인공으로 그녀의 개인사와 중심을 이룰 것 같은데, 사뭇 기대가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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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웨이, 알렉산더 페인)

 언젠가 엄마와 함께 주부용 아침드라마를 보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진짜 인생이 저런 드라마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혼을 하거나 남자친구에게 버림 받아도 언제나 더 좋은 남자가 딱 대기하고 있고. 심지어 연하에 부자이기까지 하니까 이혼 할 맛 나겠다."

와인 애호가 마일즈의 삶 역시 그러했다. 부인과 이혼하고, 몇 년을 공들인 소설의 출판이 무산되고, 얼간이 같은 친구의 실수 때문에 얼토당토한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에게도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
'그녀'라는 변수가 그의 인생의 한 귀퉁이에 대기하고 있었던 것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삼류드라마 같이 초미녀의 재벌녀는 아니었지만.)
 

미처 생각지 못했던 변수. muse 노랫말 처럼 unintended choice에 대한 기대.
그런게 있어서 그냥 저냥 살아가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언젠가는 이 기대감도 무너지게 될 때가 오겠지만 다행히도 그때가 지금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아직은 청춘이라는 위로)

결국은 사이드웨이도 러브스토리란 말인가.
대신 와인향이 짙은 러브스토리.

- 2007.08.1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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